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도 요시후미 (문단 편집) == 이력 == 1970년대 중반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의 작품에서 작화팀에서 활약했다. 유일한 감독작은 1995년 [[귀를 기울이면(애니메이션)|귀를 기울이면]]. 표현력이 정말 뛰어나서 [[타카하타 이사오]]는 그를 칭찬했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반면 [[미야자키 하야오]]에겐 "넌 문제가 있어." 라면서 늘 지적하고 리테이크를 먹여댔으며 칭찬도 안 했기 때문에 미야자키는 콘도에게 강한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 1979년작 빨강머리 앤 때는 타카하타 감독이 작화감독인 콘도를 의지하고 편애하는 것을 보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어?라며 질투를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는 15화까지 참가하고 도중에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감독직을 자청하고 "앤은 싫다. 나머지를 부탁한다."며 떠나버렸다. ]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에 흥미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부에 소속했다. 1968년 3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상경해서 동경에 있는 도쿄디자인컬리지라는 학원의 애니메이션과에 입학한다. 처음에는 만화가가 되고 싶어서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문하생이 되었다가 위화감을 느끼고 나왔다, 같은 해 알바개념으로 학원에서 초청 강사로 강의를 하고있던 [[오오츠카 야스오]]에게 소개를 부탁해서 오오츠카 야스오가 [[신에이 동화|A 프로덕션]]을 소개해 줘서 10월 1일 입사했다. 오오츠카는 콘도에 대해 잘 모르면서 추천해줬는데, 나중에 A 프로덕션의 제작팀장이 "어디서 그런 인재를 구했냐? 앞으로도 그런 인재가 있으면 꼭 소개해 달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거인의 별]]에서 동화맨으로 시작했는데, 두각을 나타내고는 1년 만에 원화맨으로 승격했다. 19살 때의 일이다. 그러다 A 프로덕션에서 만든 [[루팡 3세]] 시리즈에 동화와 원화로 참가하면서 이때 연출을 맡은 [[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 콤비와 인연을 맺었다. 그들은 업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고 그는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을 감명깊게 본 적이 있었다.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1974년에는 회사 동료와 결혼. 1976년에는 [[일본 공산당]]에 당원으로 가입해서 거주지의 주민운동에 힘썼다. 1977년에는 장남이 태어났다. 1978년에 [[신에이 동화]]를 퇴사하고, 이후 타카하타와 미야자키 콤비와 행동을 같이 했다. [[닛폰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서 [[미래소년 코난]], [[빨강머리 앤/애니메이션|빨강머리 앤]](캐릭터 디자이너와 작화감독. 29살)을,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에서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명탐정 홈즈]]의 원화를 그렸다. 명탐정 홈즈에서 모리아티 교수의 두 명의 부하는 콘도와 그의 동료 [[토모나가 카즈히데]] 콤비를 미야자키 하야오가 관찰하고 캐릭터화한 것이다. 그 캐릭터와 비슷하게 수줍음이 많고, 말수가 적은 성격이었다. [[작화]] 면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지원한 오른팔 왼팔 역할을 하는 원투 펀치적 존재였다. 미야쟈키와 타카하타가 떠난 텔레콤에 남아 [[리틀 네모]]의 [[https://www.youtube.com/results?q=little+nemo+1984|파일럿 필름]](1984)을 [[토모나가 카즈히데]]와 공동으로 연출했다. 1985년에 텔레콤을 퇴사하고 프리랜서가 된다. 같은 해 6월에서 8월까지 폐[[기흉]](자연기흉)으로 입원 생활을 했다. 1987년, [[스튜디오 지브리]]로 이적. [[반딧불이의 묘(애니메이션)|반딧불이의 무덤]], [[마녀 배달부 키키]], [[추억은 방울방울]], [[모노노케 히메]]에서 [[작화감독]]을 담당, 다른 작품에서는 원화맨으로 참여했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정사원 제도를 도입해서 정식으로 입사한 것은 1989년 9월이었다. [[반딧불이의 묘(애니메이션)|반딧불이의 무덤]]과 [[이웃집 토토로]]가 동시에 제작 시에, 미야자키와 타카하타는 콘도를 서로 자신의 팀에 데려가기 위해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야자키는 다른 스태프는 괜찮으니 콘도만큼은 데려가야겠다고 우겼다. 아이들의 걸음걸이나 몸짓 등의 리얼한 표현은 자신보다 콘도가 더 잘 그린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결국 직접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타카하타가 "近ちゃんが描かなきゃ作らない(콘쨩(콘도 요시후미의 애칭)이 그리지 않으면 안 만든다.)"고 우겨서 그를 양보했다. {{{#!folding 스즈키 토시오가 밝힌 제작비화 ▼ ||두 편을 동시에 만든다는 것은 스튜디오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기치조지에 있는 지브리 스튜디오 근처에 스튜디오를 하나 더 빌렸다. 누가 어떤 스튜디오를 사용할지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미야는 원래 새로운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장 고민한 부분은 스태프였다. “두 편 동시 상영 스타트!”라고 말한 그날, 지금까지 일하던 주요 스태프들을 모두 미야가 확보해놓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도 그는 굉장한 사람이다. 그때 곤 짱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작화감독 콘도 요시후미를 미야와 다카하타가 서로 데려가려는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 무렵 미야는 하야시 아키코라는 그림책 작가가 그린 『첫 심부름』이란 작품을 보고 감동한 상태였다. 그 책에는 네 살쯤 되는 여자아이가 등장하는데, 그 나이대 아이들은 대개 똑바로 서서 걷지 못하고, 반드시 몸을 앞으로 숙이든지 뒤쪽으로 젖혀서 걷게 마련이다.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한 사람이 하야시 아키코였다. 그림쟁이인 미야는 그런 점을 재빨리 발견하고, 그곳에 움직임을 붙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리얼리즘을 가장 잘 표현할 사람이 누구일까? 그때 찾아낸 사람이 콘도 요시후미였다. 당시 콘도는 지브리 사람이 아니라서 미야는 그를 설득하러 갔다. 한편 콘도를 원하는 것은 다카하타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곤 짱이 좋아.” 원하는 사람이 미야와 겹친다. 조정을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나는 누가 콘도와 작업을 하는 편이 좋을지 몰라서 일부러 그를 만나지 않았다. 어설픈 마음으로 만나면 오히려 상황이 복잡해질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이때 재미있었던 것이 미야와 다카하타의 행동이다. 미야는 뻔질나게 콘도를 찾아가 열심히 설득했다. 반면에 다카하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미야 씨는 콘도 씨를 설득하러 갔는데, 다카하타 씨는 가지 않아도 됩니까?” 내가 그렇게 말해도 “그건 프로듀서 쪽에서 정할 일이야”라고 대꾸할 뿐이었다. 미야가 다른 사람을 추천해도, 다카하타는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다카하타를 만나 직접 물어보았다. “콘도 씨가 맡아주지 않으면 「반딧불이의 묘」는 어떻게 됩니까?” “그럼 만들 수 없겠지.”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일이 여기까지 진행됐는데, 이제 와서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하다니! 내가 결단을 내린 것은 그때였다. 미야는 자신이 직접 그리면 된다……. 나는 콘도를 찾아가 솔직하게 물었다. “솔직히 어느 작품을 하고 싶나요?” “양쪽 모두 하고 싶습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주십시오.” “저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스즈키 씨가 정해주시면 그걸 따르겠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원망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반딧불이의 묘」를 만들어주십시오.”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 길로 미야를 만나러 갔다. 감이 좋은 미야는 내가 가자마자 사태를 알아차리고 화를 내며 토해내듯 말했다. “난 그만두겠어! 건초염이라고 하면서 내일부터 입원할 거야. 곤 짱을 빼앗겼다는 둥 분해서 일을 못할 거라는 둥 뒷담화는 딱 질색이야. 내가 입원하면 「반딧불이의 묘」도 만들 수 없겠지.”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럴 때 나는 당황하지 않고 화내고 싶은 만큼 화내게 내버려둔다. 그러고는 미야가 집에 가겠다고 말할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준다. 편집자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작가가 화를 낼 때도 직성이 풀릴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8시쯤에 미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곤 짱을 마구 패줬어.” 깜짝 놀라 자세히 물어보니 꿈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미야는 이윽고 “이제 마음이 풀렸으니까 작품을 만들겠네”라고 말했다. 그것이 「이웃집 토토로」의 시작이었다.||}}} 1995년 작 [[귀를 기울이면(애니메이션)|귀를 기울이면]]은 미야자키가 콘도에게 그동안 작화감독으로 오른팔 역할을 하며 도와준 은혜를 갚기 위해, 전부터 연출을 하고 싶다던 콘도에게 감독직을 맡기기로 한 약속을 지킨 작품이었는데, 각본과 그림콘티를 그린 미야자키 특유의 간섭이 심해서 만드는 내내 서로 의견 충돌이 잦았다. 귀를 기울이면 원작만화대로 남자 주인공을 화가 지망생으로 그리고 싶어하는 콘도에게 [[바이올린]] 제작자를 지망하게 한 것도 미야자키였고, 여주인공이 치마를 감싸며 다소곳이 앉는 장면에도 팬티가 보여도 되니까 확 주저 앉아야한다고 참견을 한 것도 미야자키였다. 훗날 콘도가 사망했을 때, 미야자키는 자신의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태도가 콘도의 죽음을 재촉했다며 자책하기도 했으며, 이후 다른 감독들과 작업할 때에는 가급적이면 심한 간섭은 자제하게 되었다고 한다.--하지만 이후에도 하야오의 간섭 때문에 일어난 마찰로 안도 마사시와 호소다 마모루가 지브리를 떠난다...--[* 이 이후에는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직접 기획울 해 미야자키답지않게 완전히 타 감독에게 맡겨보는 엄청난 시도를 했고 성공적이었으나 결국 모기업에 의해 제2의 후계자나 다름없던 모리타 히로유키마저 내쫓겨 결국 후계자를 찾지 못한 스튜디오 지브리는 '''지브리의 자랑거리였던 정규직 제도와 월급제를 스스로 전면 폐지해버리고 제작팀마저도 해체해버린 후''' 회사주식 상당부분을 닛폰 테레비에 매각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유포테이블, J.C.STAFF, A-1 픽쳐스, 샤프트, 프로덕션 I.G와 같은 제작사에 밀려 쇠퇴함을 보여주고 있고 애니메이션 스탭은 사실상 미야자키 고로, 스즈키 토시오, 미야자키 하야오 등을 포함한 소수만이 남아 사실상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개인 제작사가 되었다.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가 후계자를 찾겠다고는 했지만 후계자를 이대로는 못찾아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한 이후에는 미야자키 고로만이 남아 3D로 전환함과 동시에 2D 애니를 완전히 접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2015년에야 간섭이 멈췄지만 그 직후 제작팀이 해체된 만큼 지브리에 들어오고 싶은 감독은 없을 게 뻔하다.][* 또한 공교롭게도 콘도 요시후미와 모리타 히로유키는 모리타 감독이 맡은 영화 고양이의 보은이 귀를 기울이면의 극중극이라는 설정이 있는 만큼 둘 다 같은 원작자의 작품을 맡았다는 점이 연관점이 있으며 후계자로 예측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타카하타와 미야자키의 후계자로 촉망받는 인재였으나 [[모노노케 히메]]의 작화감독을 마치고 차기 연출 감독 작품이 기대되는 가운데 1998년 1월 21일 [[대동맥 박리]]로 사망했다. 몸에 무리가 가게 일을 많이 해서 갑자기 숨진 과로사였다. 훗날 부인이 말하기로는 병원에 실려가고 입원 수속도 밟기 전에 사망한 급사였다고 한다. 그는 이즈음 차기작으로는 [[하이타니 겐지로]]의 [[하늘의 눈동자]] 같은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 인터넷은 타카하타와 미야자키 두 감독중에 누가 콘도 요시후미를 죽였느냐는 테마로 글이 올라와 있기도 하다. [[반딧불이의 묘(애니메이션)|반딧불이의 무덤]]을 마치고 한 쪽 [[폐]]를 적출하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콘도가 [[스즈키 토시오]]에게 [[추억은 방울방울]] 때에 타카하타가 리얼리티 묘사에 너무 집착해서 까다롭고 육체적으로도 힘든 작업량을 요구해서 "高畑さんは僕を殺そうとした 高畑さんのことを考えると、いまだに体が震える(타카하타상은 나를 죽이려고 했다 타카하타상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떨린다.)"라고 중얼거렸다는 증언이 있고, [[귀를 기울이면(애니메이션)|귀를 기울이면]] 때에는 미야자키 하야오한테 연출 면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고 큰소리로 혼나고 서로 의견 충돌을 일으켜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폐[[기흉]]으로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고 한다. 미야자키는 훗날 "내가 끝을 내버린 것(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自分が終わりを渡してしまったようなもの」)"라고 말을 했다. 콘도의 장례식에서 화장장에서 베테랑 애니메이터가 "近ちゃんを殺したのは、パクさん(高畑の愛称)よね(콘 쨩를 죽인 것은 파쿠상(타카하타)이죠?"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그 말을 들은 타카하타는 말없이 한참 후에 고개를 끄덕거렸다고 한다. 장례식에서 타카하타의 뒷순서로 조사(弔詞) 를 낭독한 미야자키는 "왜 타카하타 작품 따위에 참가했느냐 내 작품에만 참가해야 했다."고 고인을 질책하면서 그를 잃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표했다. 콘도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처럼 지브리에 미야자키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는 상황은 오지 않았을 거라며 아쉬워하는 지브리 팬들이 많은데 사실 생년월일을 보면 알겠지만 미야자키와 9살 차이로 후계자는 맞지만 '차세대'라고 하기는 어려운 나이였다. 어쨌든 콘도의 사망으로 인해 미야자키는 어쩔수 없이 모노노케 히메 제작 후 은퇴하겠다고 한 것을 번복하고[* 이 때문에 콘도 요시후미가 살아있었다면 정말 미야자키가 은퇴했을 수도 있다는 설이 있지만, 미야자키는 이후로도 은퇴 선언을 여러번 번복한데다 2023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제작이후 오히려 나는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라고 할정도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으면 견디질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은 얘기다.] 복귀했는데 복귀한 후 만든 작품이 바로 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물론 그것과 별개로 콘도같은 출중한 애니메이터가 사망한 것은 당연히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이다. 한국에서는 콘도 요시후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지브리의 후계자 자리가 사라지자,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쩔 수 없이 다시 감독직으로 복귀했다는 식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전후사정을 따지고 살펴보면, 1997년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체력적인 한계를 느껴서 장편 애니메이션 감독직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은퇴선언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감독직은 이제 더 이상 안한다는 거였고, 애니메이션은 계속 만들 생각이었다. [[귀를 기울이면(애니메이션)|귀를 기울이면]]처럼 자신이 각본과 그림 콘티를 쓰고 감독직은 따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고 그 감독직으로 염두에 둔 인물이 스튜디오 지브리의 젊은 유망주 31살의 [[안도 마사시]]였다. 하지만, 안도 마사시가 감독직을 맡기를 거부해서[* 이후 세월이 지나 2021년 [[사슴의 왕]]으로 공동 감독으로 데뷔한다.] 그렇다면 이건 내가 할 수밖에 없네라고 다시 감독을 하고 만든 것이 센과 치히로였다. 콘도 요시후미의 죽음은 1998년 1월의 일로 그 도중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1997년에 이미 감독직은 안도 마사시에게 맡길 생각을 했고, 안도 마사시가 감독직을 거부해서, 본인이 다시 센과 치히로의 감독을 맡은 거라. 사실관계만 따지자면 콘도 요시후미의 죽음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감독직 복귀는 거의 관련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참고로 미야자키는 2010년대에 [[요네바야시 히로마사]]를 감독으로 두고 기획과 각본은 자기가 하는 식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후계자를 안 키웠다는 것도 낭설에 지나지 않고 미야자키는 예전부터 제자를 꾸준히 키우고 있었다. 단지 스폰서가 미야자키가 아니면 돈을 안 주겠다고 투자를 거부하거나, 지브리 스타일에서 벗어난 작품을 만들고자 회사를 나가는 등 여러 차질이 있어서 뜻대로 안 됐을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